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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터뷰]‘고산자’ 차승원 “김정호,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기사 등록 2016-09-13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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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데일리 양지연기자]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차승원은 우선 겉모습에서 느껴지는 인상부터 강렬했다. 모델 출신이라 그런지 멀리서 걸어오는 ‘포스’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가 가진 배우로서의 아우라와 인간적인 친근함의 경계가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유머를 즐기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성장한다는 그는 배우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도 배울 점이 참 많아 보였다.

이는 그가 출연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감독 강우석, 이하 고산자)’ 속 김정호와 닮은 모양새이기도 했다. 위대한 유산을 남긴 위인인 동시에 딸의 앞에서는 누구보다 약한 아버지였던 김정호는 차승원과 분명히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조선 팔도를 누비며 지도를 그려갔던 김정호의 삶, 차승원도 그처럼 자연을 즐기는 사람일까.

“아예 젊었을 때는 차를 타고 가면 주변에 있는 경관들에 눈이 안 돌아갔어요. 제가 가는 목적지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나오면 좀 봐요. ‘되게 좋네, 되게 잘 돼있네’ 하면서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자연은 불변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불변에는 어떤 위대함이 있어요.”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늘 작다. 경이로운 풍광은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압감을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울림을 안기기도 한다. 특히 이번 ‘고산자’에는 스크린 가득 차는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 장면은 관객들의 마음 속 응어리진 무언가를 해소할 만큼 극적이기도 하다. 실제 백두산에서 김정호로서 촬영에 임했던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두산은 ‘가서 좋았어요’ 이게 아니라 다른 느낌이죠. 그건 좋고 나쁨이 아니죠. 영화를 보면 CG같잖아요. 그런 비현실적인 느낌이 있어요. ‘어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요. 너무 하늘과 가깝고 그래서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이 안 나오면 이상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고요. 다른 산하고는 완전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김정호는 실존 인물이지만 역사적으로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다. 영화 속에서 김정호는 백두산을 밟았지만 실제로도 그가 백두산에 갔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차승원은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김정호이기에 이 역할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완전히 훼손하지 말아야 할 이순신 같은 위인이 있고, 또 훼손정도는 아니지만 기록이 없으니 조금은 더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는 위인이 있어요. 김정호는 신분 자체가 중인이니까 여지를 좀 남겨둘 수 있었죠. 아마 김정호라는 사람의 신분이 양반이었으면 안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남긴 업적이야 위대하지만 그것보다 제가 표현하고 싶은 김정호는 ‘사람’의 모습이 컸어요.”

그래서 그는 더더욱 ‘초라함’과 ‘가벼움’을 의도했다고 설명했다. 본인 스스로 김정호에 대해 약간은 헐렁헐렁하고 가벼운 인물이라는 설정을 부여했다고. 우선 김정호에 대한 기록 자체가 너무 없는데다가 그가 남겨놓은 ‘대동여지도’라는 유산이 ‘억 소리가 날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실존인물에 자신의 색을 입혀 훌륭하게 표현해낸 차승원은 차기작에 대한 질문에 다시는 실존인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예상외의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실존인물, 다시는 안 할 거예요. 세종대왕, 이순신 이런 분들처럼 실존인물은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잖아요. 이게 자칫 잘못해서 그 이미지를 심하게 벗어나면 연기를 잘하든 못하든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경우가 있죠. 위인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인식이 있는데, 물론 이것을 변주하고 색깔을 입히는 게 배우의 몫이지만 이게 이상하게 표현되면 위험하죠.”

실제로 존재한 누군가를 연기하는 것의 무게를 정확히 느끼고 있는 차승원은 그래도 김정호라는 인물은 상세한 기록이 없고 결과만 남기고 떠난 분이기에 추측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서 김정호의 신분 자체가 해봄직한 신분이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물론 그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김정호의 사회적 위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승원은 작품을 고를 때 배우로서 행복하고 의미 있는, 한 마디로 ‘창피하지 않은’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라고.

“처음에 시나리오를 보는데 장면으로 따지면 한 장면이 좋았어요. 지도 펼치는 장면. 그 장면 때문에 하게 됐죠.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과연 김정호는 왜 지도를 만들었는지가 설명이 되고요.”

그는 이 장면에서 ‘김정호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이처럼 누군가를 온전히 담아낸 영화 속에서 한 인물을 쭉 훑어간다는 것은 배우로서 큰 모험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차승원에게 더더욱 의미 있는 작업으로 남게 됐다. 언론시사회 때 그가 했던 발언처럼 ‘고산자’는 차승원의 연기인생 중 중요한 지점에 있다.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연기의 길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신중하게 선택해나가는 그의 모습에서 배우로서의 자존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차승원은 영화가 지나친 민족주의에 기대 감동을 주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연륜이 묻어나는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나 특정 장면들이 한 쪽으로 편향되거나 편중되면 안 되겠지만 민족적인 정서를 아예 배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호가 그린 지도에 독도가 있어요. 상징적인 의미죠. 이것에 감동받는 세대가 또 있고요. ‘아 이거 뭐야’하면서도 눈물이 납니다. 제가 그런 것에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태생적으로는 대한민국 사람이니까 그것에 대해 나쁘다, 나쁘지 않다 얘기를 할 수는 없어요.”

단호하게 소신을 밝히면서도 그는 그런 장면이 본인 취향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여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기도 했다. 가까이서 본 차승원은 이처럼 누구보다 유머러스함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겪은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깊이 있는 사고를 부드럽게 표현해내는 화술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연달아 사극을 해서 향후 10년간은 사극은 하지 않을 것이라던 차승원은 본인의 장점을 잘 알고 있는지 다음 작품에서는 블랙코미디를 시도해보고 싶다고 했다.

“극단적인 거. 뭐라 그럴까, 너무 어둡거나 이런 거가 좀 꺼려져요. 좀 그래, 사실은. 이것도 뭐 변할 수도 있겠죠. 극악무도한 역할이 몇 번 들어왔었는데 나이도 있고 애도 키우고 그러니까 선뜻 할 수 없더라고요. 하면 잘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결정하기가 어려웠어요. 일단 기본적으로 저는 코미디를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제 나이도 있으니까 블랙코미디를 시도해보고 싶어요. 어두운데 약간 비트는, 이런 것들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죠. 기본적으로 심심한 거는 잘 못 견디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차승원은 자신과는 성향이 다른 어떤 인물을 탐구하고 몰두하는 데 도전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 지점에 있는 작품들이 이번 ‘고산자’나 이전 작품 ‘하이힐’ 같은 경우였다. 편하고 익숙한 것에 안주하지 않는 태도 때문일까, 그는 해가 갈수록 연기력에 성숙함을 더해 이제 연기력에서만큼은 어떤 논란도 일으키지 않는 배우가 됐다. 그러나 차승원은 이 같은 성장에도 특별한 비결은 없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올바른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연기에 자신이 표현되기 때문이죠.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은 지켜보면 공감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무언가를 볼 때 어떤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이게 아니라 보편적인 사고방식에 자기 생각을 입히는 것이 중요해요. 어떤 배우들은 자기 혼자 자기감정에 취하잖아요. 그러지 않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관찰해야 해요. 자기 색깔을 입히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세상을 잘 사는 게 중요하죠. 살아온 습관과 만나는 사람이 모두 연기에 표현되니까요.”

앞으로 차승원이 어떤 새로운 역할, 심지어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인물을 연기한다고 해도 대중은 그가 부자연스러운 옷을 입었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차승원은 이미 사람답게 사는 것이 진정한 배우가 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연기관이 곧 인생관으로 통하는 배우 차승원. ‘고산자’에 김정호의 인격뿐만 아니라 차승원이 평소에 지닌 가치관과 신념이 모두 담겨있는 것처럼, 앞으로 보여줄 또 다른 인물을 통해 그가 얻은 인생의 가치를 전달받길 기대한다.

양지연기자 jy4429@ 사진 조은정 기자 j_e_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