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천만돌파①]시니컬한 '인간실격'에 천만이 공감한 이유

기사 등록 2016-08-0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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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데일리 성찬얼기자] 마침내 2016년 천만 영화가 나왔다. 7일을 기점으로 총 누적관객수 1003만 8401명을 돌파한 영화 '부산행(감독 연상호)'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매해 초 천만영화가 나왔던 것에 비해 올해는 8월, 한 해의 중반을 넘어가서야 천만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 다소 늦은 만큼 첫 천만 영화에 그만한 관심이 몰리는 건 당연하다. 천만영화는 그해의 트렌드이자 은유이기 때문이다. '부산행'은 그럼 2016년의 어떤 은유를 담고 있는 것일까.

(이하 기사 내용에는 '부산행' 전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포함돼 있으므로 영화를 미관람한 독자들은 차후 관람 후 읽는 것을 추천한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연상호 감독의 작품이다. 그러나 온건히 그의 것이라곤 할 순 없다. '부산행'의 결말에는 미약하게나마 새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여건이 준비돼있으며 그 안에 새 생명을 품은 여성이 포함된다는 희망이 내포돼있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을 포함한 세 명의 작가가 머리를 맞대 빚어낸 시나리오에는 대중을 향한 최소한의 배려가 담긴 셈이다.

그러나 영화 전개에도 연상호 감독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이 빛나는 장면은 분명히 존재한다. 주인공 석우의 성격, 그리고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인 몰살 장면, 그리고 용석이 감염되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석우(공유 분)은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지만 수안(김수안 분)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또 선물할 정도로 무심하다. 본인의 말로는 수안과 함께 살고 싶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진심, 즉 어떤 대가없이는 치르고 싶지 않은 '희망사항'처럼 보인다. 거기다 그는 임산부인 성경(정유미 분)이 감염자들로부터 도망쳐오는 것을 보고도 문을 닫으려 하고, 이후에도 성경과 그의 남편 상화(마동석 분)에게 사과하길 꺼려할 정도로 계산적이다.

석우의 성격을 성장영화적인 요소나 주제의식을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 등 이런 식으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이기심은 연상호 감독의 전작 속 주인공들이 가진 공통적인 면을 닮아있다. '돼지의 왕'에서 첫 장면부터 아내를 살해해버린 경민이나 '창'에서 상대에게 똑같은 규율을 강요하는 정철민의 이기적인 면모가 그저 '상업영화' 틀에 맞게 어느 정도 포장됐을 뿐이다.

그럼에도 다른 점이라면 석우는 이들과 달리 영화의 전개 속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차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아남게 되고 이는 곧 용석(김의성 분)의 무리와 정확히 반대에 서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석우와 용석의 대립에서 용석의 무리가 단 한 사람 종길(박명신 분) 때문에 몰살되는 장면은 단연컨대 가장 '연상호'스러운 시선이 대번에 드러난다. 여기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그 사람들을 보며 이미 언니 인길(예수정 분)을 잃은 종길은 "놀고들 있네"라고 냉소적인 발언을 한다. 그리고 그는 감염자들이 있는 쪽의 문을 활짝 열어버린다. 이 장면에서 생존자 무리는 타인을 격리한다는 이유로 더 큰 위험을 방치하는 실수를, 종길은 자신의 삶을 타인의 생명보다 우위에 두는 이기심을 범한다. 그래서 결국엔 이기심과 이기심이 맞붙는, 굉장히 희귀한 장면으로 그려진다.


사실 여기까지가 연상호 감독의 '인장'이 찍힌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동대구 역에 도착한 석우일행이 살아남기 위한 장면은 작품 속 '인간 간의 투쟁'의 톤을 확실히 던져버리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는 생존자들의 도피 행각이 부각되며 지금까지와 달리 갈등이 아닌 일방적인 사건으로 구성된다. 결국 연상호 감독의 독특한 시선이 느껴지는 이 동대구까지의 장면이야말로 영화의 핵심이자 주제와 맞닿는 부분이다.

모두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상황에서 종길이 "놀고들 있네"라고 말하며 생존자들을 그토록 질색하게 한 건 뭣때문일까. 바로 '분쟁'이다. 용석을 비롯한 이 생존자 무리는 오로지 자신들만의 생존을 토대로 한다. 물론 관객들은 그 사실을 긍정할지도 모른다. 본인들도 역시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부산행'은 그들의 우두머리 용석에게 관객들이 부정할 수 있는 특성들을 부여한다. 2015년 '베테랑'을 통해 입증됐던 사회적 현상인 '갑질'은 물론 매 집회 때마다 제기되는 '선동' 등을 투여한다. 그 결과 용석(과 무리들)은 생존에 적합한 판단을 했다는 것 이상으로 '이기심'이 부각된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부산행'은 그 '이기심'의 발로는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인정한다. 용석이 감염자가 됐을 때의 묘사를 보면 그렇다. 다른 감염자들은 모두 물리고나서 어떤 자각 없이 바로 감염자로 변모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용석만큼은 확실한 감염의 증상이 드러나도 '집에 데려다달라'라고 말하는 순간이 그려진다. 이는 그런 분쟁의 원인들이 일순간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혹여 사라지는 와중에도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될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음을 넌지시 암시하는 영화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돌파한 건 그래서 이 사회를 돌이켜볼 만한 시점을 제공한다. 인간의 이기심과 그로 인한 분쟁, 그 과정을 장르적으로 풀어낸 '부산행'은 관객들이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사회적인 양상에 대해 은연 중에 암시했다. 그리고 결과는 2016년 최초로 천만 관객을 모을 만큼 공감을 받았다.

물론 서술했듯 '부산행'은 상업영화로서 마지막 희망을 제시한다. 희망적인 결말도 그렇지만 용석의 변화처럼 상화와 석우 역시 의지로 감염의 순간을 미루는 장면들을 담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공감한 부분이 전자(인간에 대한 실망)인지 후자(희망적인 인간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부산행'은 두 가지 양면을 적절하게 담아냈으며 어느 쪽이든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단순히 숫자로서의 '천만'이 아니라 시선으로 대한 '천만'은 이토록 영화의 내포된 의미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부산행'의 천만이 한국영화계의 장르적 다양성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음을 알리는 최소한의 신호탄으로 보이는 건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사진=NEW 제공)

 

성찬얼기자 remember_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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