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선의 영화 원정기]‘고산자’-‘행복한 사전’ 장인정신과 느림의 미학이 창조한 ‘문명’

기사 등록 2016-09-09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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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데일리 한해선기자] ‘만인을 이롭게 하리라’는 일념으로 평생을 헌신한 이들의 공적은 분명 고평가할 만하다. 분야를 불문하고 역사 속 선구자가 낳은 유물은 현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장인정신’이 오롯이 깃들여졌을 때 더욱 전파력이 있다.

조선시대 말까지 대한민국의 지형은 매번 그저 발길이 닿는 곳이 곧 지도가 되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었다. ‘한 치 앞만 알 수 있는’ 정도의 지식으로는 어둠 속에서 걸음마를 디디는 수준과 같았으며, 그만큼 ‘지도’라는 개념 자체도 확립되지 않았다.

‘고산자, 대동여지도’(감독 강우석, 이하 ‘고산자’)에서는 그러한 이유로 산행에서 목숨을 잃은 아버지에 대한 추도로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는 김정호 선생(차승원 분)의 삶이 그려진다. 심리적 외상이 예술로 승화되는 예로는 이 땅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작품들이 언급될 수 있겠다. 대동여지도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일종의 예술 분야에 포함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고산자’의 출발은 치유를 갈구하는 김정호의 심적 상태에서 비롯됐을 터다. ‘몰두’는 치유의 지름길임을 깨닫게 된 탓인지 김정호는 하나뿐인 딸 순실(남지현 분)이 열여섯 나이가 되는지도 잊은 채, 지도에 미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에도 아랑곳 않고 일생을 ‘진짜 지도’ 만들기에 바친다.

우직한 신념으로 3년 반 동안 목가적 향유와 함께 전국 팔도를 누빈 기나긴 여정은 어느덧 김정호를 장인(匠人)으로 만들었고, 대동여지도는 만인에게 이로움으로 남았다. 실제 역사에서 김정호의 생애는 거의 기록된 바 없지만, 지리학자로서의 족적을 조명해볼 값어치는 충분했다.




묵묵하게 일생을 한 우물만 판 김정호를 대하자니, 문득 ‘행복한 사전’(감독 이시이 유야, 2013) 속 마지메 미츠야(마츠다 류헤이 분)가 떠오르기도 한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마지메는 출판사 영업부에서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가 얼떨결에 사전편집부에 합류한 후 ‘대도해’(大度海)라는 새로운 사전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단어들을 수집하며 사람들과 차츰 언어로 소통하는 즐거움을 배워나간다.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1995년에서 2009년까지의 세월동안 마지메는 이름의 뜻처럼 ‘성실하게’ 꼬박 사전을 채워나간다. 1990년대 끝자락, 개인 컴퓨터의 상용화 시대가 도래하지만 오로지 수작업으로 총 3000만개의 단어가 담긴 종이사전을 완성시키는 모습이 참으로 고집스럽다. 다소 느리고 미련해 보일지라도 흔들림 없는 신념으로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미학으로 비춰진다.

최근 ‘슬로우 라이프’가 새 바람을 타고 있는 것도 꽤나 납득이 간다. 오래 거치는 것은 오래 머물기 마련이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니 한 손이라도 더 닿아 알차게 완성되는 것이다. ‘장인정신’이 굳이 ‘그들’만의 것일 필요는 전혀 없다.





(사진='고산자, 대동여지도', '행복한 사전' 포스터 및 스틸컷)

 

한해선기자 churab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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