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구]김수현 드라마 읽기 '천일의 약속'

기사 등록 2011-12-1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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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데일리 박혜정기자]SBS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우여곡절 끝에 지형(김래원)과 서연(수애)이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알츠하이머 진단에 이어 파혼을 거치면서 드라마는 중반을 향해 치닫고 있지만,두 사람의 결합에 가장 기본적인 장애 요소는 역시 신분의 격차일 것입니다. 상류층과 서민층 자제의 결합을 둘러싼 주변의 온갖 갈등은 드라마에 흔하게 나타나는 일이고, 불치병을매개로 한 순애보 역시 멜로드라마에선 새삼스러울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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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구도에 뻔한 이야기를 가지고도 시청자들을 흡입할 수 있다는건 역시 작가적 내공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드라마 목적은 시청자들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들어 매주 드라마 앞에 앉게 하는 것이 드라마의 목적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단순히 재미 이상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을만한 강력한 흡입력이 필요한데, 흡입력에 관한 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게 바로 김수현 드라마입니다.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는 사랑에서 불륜에 이르기까지 김수현은 격정적인 남녀의 이야기만 가지고도 수십년째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등장 인물들이 속사포처럼 내뱉는 대사들만 봐도 금새 그녀의 드라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일의 약속'을 중심으로 김수현 드라마의 몇가지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그녀의 대본 만큼이나 흥미로울 듯싶습니다.

01. 부유하고 반듯한 매력남과 자존심 강한 악바리 여자

상류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로맨스는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무척 흔한 설정입니다. 그런데 김수현 드라마에선 여자 주인공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주인공은 청순가련형이 아니라 계층에 관계없이 대개 남다른 자존심과 오기로 뭉친 존재입니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비록 가진 것 없고 배경도 보잘것 없지만, 워낙 자긍심이 강한 탓에 매회 자존심과 허세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상류층 남자와의 만남을 이어갑니다.

여자는 남자와 '연애'한다기 보다는 그를 '상대'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신분 격차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존재감으로 어필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그런 여자의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며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시청자들도 덩달아 드라마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주인공의 강력한 존재감은 김수현의 날선 대사를 통해 구축됩니다. '천일의 약속'에 등장하는 서연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부모 없이 고모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서연은 남동생과 함께 독립해서 살고 있다가 설상가상으로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고 망연자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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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층 남자인 지형은 예정된 자신의 혼인마저 깨뜨리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불사하며 서연에게 달려오지만 서연은 그런 지형의 손길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지형의 애틋한 사랑을 동정에 가까운 연민으로 치부하며 그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형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에도 그녀는 남자가 보듬어주는 사랑은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사랑도 결국 자신이 인정해야 가능하다고 여길 만큼 서연의 자존심은 남다릅니다.

02. 갈등을 넘어선 캐릭터 드라마

기본적으로 드라마는 '갈등'입니다. 김수현 드라마는 거기에 더해 등장 인물들의 '개성'을 따라가는데 주력합니다. 그러한 개성은 인물들의 세심한 심리 묘사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자존심 강한 여인이나 독한 엄마가 독설을 내뱉거나 날카롭게 대립하며 자신만의 가치관을 드러내고 자신만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개성 넘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김수현의 드라마에는 개성없는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캐릭터가 주는 재미가 바로 김수현 드라마의 인기비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천일의약속'에서도 그런 다양한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상류층 집안의 부모들이나 서연의 고모댁 식구들이 펼쳐보이는 개성있는 모습들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드라마를 강렬하게 이끌어가는 요인입니다. 그 만큼 김수현의 드라마는 사건보다는 인물에 집중하는 것이 한 특징입니다. 그래서인지 김수현 작가는 드라마는 스토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쓰는 것이라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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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이 인간을 강조하는 만큼, 그녀의 드라마는 대부분 디테일한 심리 묘사에 치중합니다. 지형이 부유층과의 혼사를 놓고 끝없이 고민하는 과정이나 서연이 지형과의 만남과 이별을 놓고 번민하는 과정들이 몇몇 사건과 어우러지며 매우 촘촘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억지스러운 설정이나 무리한 상황도 이렇듯 주요 인물들의 내밀한 심리를 쫓다 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추어 시청자들에게 어필됩니다. 주인공들의 독하고 미묘한 심리에 시청자들의 감정이 실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빠져들만큼 그녀의 드라마는 흡입력이 강합니다.

03. 어김없이 이어지는 김수현식의 속사포 대사

김수현의 드라마에서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들의 날카로운 대립과 갈등은 모두 치열한 언어로 각색된 대본을 통해 구현되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담아두어야 할 세밀한 감정까지 글로 다듬어져 대사로 표현되고 있는 까닭에 김수현 드라마는 대부분 긴 호흡의 속사포 대사로 이루어지는게 또한 특징입니다. 심경의 변화나 미묘한 감정까지 고스란히 대사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아 드라마에 입체감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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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지 않아도 지루하지 않은 것도 역시 이런 '김수현식'의 신랄한 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대방과 마주하고 있을 때의 그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예리한 대사들은 김수현 드라마의 묘미라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이렇듯 각진 말본새는 상대의 속물스런 근성을 비꼬거나 각기 다른 계층군의 인물들이 자신을 옹호하거나 상대방의 이중성과 기만을 까발리는데도 아주 유용하게 활용됩니다.

서연은 처음엔 착한 남자 지형의 진심을 받아주려하지 않았습니다. 독한 말로 매섭게 지형을 몰아치는 그녀의 꼿꼿한 말 속에는 자신의 심경과 감정의 변화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가장 예민한 인물로 나오는 노이사장댁 오여사(이미숙)의 히스테리컬한 성격과 불안정한 심리는 온전히 그녀의 공격적인 대사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빵집을 운영하는 서연 고모댁 사촌 언니(문정희)의 시기심과 속물스런 성향 역시 그녀의 용맹무쌍한 말투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박혜정기자 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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