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잼있게 미술읽기'ㅡ금지된거에 대한 갈망?(클림트 '희망')

기사 등록 2011-08-17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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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희망 1],1903년,캔버스에 유채,오타와 캐나다 국립미술관.

[박정은 미술객원 전문기자]한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우리를 쳐다 보고 있습니다. 주변의 화려한 장식들과 그녀의 머리 위에 떠있는 그로데스크한 인물들, 옆으로 서있는 자세로 인해 더 볼록해 보이는 임신한 그녀의 동그란 배 ,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그동안 '클림트' 가 그려왔던 팜프파탈의 도발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그녀는 상당히 매혹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습니다. 어깨 위의 물결치는 풍성한 머리카락과 그 머리를 장식한 작지만 빛나는 예쁜 꽃들,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스러운 임신을 한 여성은 '희망'입니다. 죽음 앞에 나약하고 무기력한 인간이 할수 있는 유일한 항거는 새로운 생명의 잉태입니다. 임신한 여성, 젓을 먹는 어린아이를 묘사한 작품은 대부분 '희망' 을 그려낸 작품들이 많으며 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희망이라는 꿈' 을 꿀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데 '클림트' 의 이 작품은 밝은 '희망' 보다는 불길한 기운이 그림 전체를 에워 싸고 있습니다. 존재를 알수 없는 까만 괴물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클림트' 의 작품에서 자주 보여 주었던 죽음을 연상 시키는 그로데스크한 인물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으로 인해 그녀에게는 전혀 무관한 듯 보여 우리에게 더 위협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클림트'는 왜 신성한 임신을 한 여성을 그것도 '희망' 이라는 제목으로 그려진 그림을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그려 낸 것일까요? 그가 이 작품을 그릴 당시 그의 연인이었던 '미치 짐머만' 이 그의 아이를 임신했고 그녀와 태어난 둘째 '오토' 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습니다. '클림트' 가 임신한 여성에게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에 가득찬 희망' 을 볼수 없었던 부분적인 이유가 될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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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희망 2],1907ㅡ1908년,캔버스에 유채와 금,뉴욕 현대미술관.

그의 또 다른 작품 '희망2' 또한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그렸지만 '희망1' 과는 상당히 다르게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여인은 '희망1'처럼 벌거벗겨져 있지도 않고, 우리를 향해 도발적인 시선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배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아이에게 완전히 몰입하고 있는 그녀의 신성한 모습으로 인해 여인의 볼록한 배위에 있는 죽음의 머리도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으며 안정되고 온화해 보입니다. '희망' 이라는 제목과 아주 잘 어울리며 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다면 '클림트' 가 '희망1' 에서 임신한 성스럽고 고결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여성성' (女性性) 으로 그려낸건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다시 한번 의문이 생길수 밖에 없습니다. 임신한 여성은 곧 출산을 할 것이며 그녀는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며 이는 여성으로 보다는 어머니로서 역활과 본분을 다 한다는 뜻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클림트' 는 임신한 여성에게서 조차 관능미를 이끌어 냈으며 '희망1' 에서 그려진 그녀는 임신한 볼록한 배만 가린다면 몹시 유혹적인 모습입니다.

'클림트' 는 민족적인 영웅 '유디트'를 그려 냈을때도 그녀의 용맹스러움이나 애국심을 표현한것 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에 있는 욕정을 이끌어 내어 여성의 내면에 잠재된 '성녀'와 '요부'의 이미지를 '민족적 영웅 유디트' 와 결부 시켜 작품을 표현 하였습니다. '희망1'도 임신한 여성 자체에 촛점을 맞추었다기 보다는 신성하고 자애로운 모성속에 잠재된 '여성성' (女性性),즉 본질적인 여성의 성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임신으로 인해 금지시 되어야 되는 것들에 대한 동경과 갈망의 눈빛을 우리에게 보내고 있는듯한 그녀의 유혹적인 눈빛에서 어쩌면 '클림트' 는 보여지는 어떠한 도덕적 윤리와 가치보다는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욕구를 먼저 생각하는 솔직함을 그림을 통해서 표현해 내고자 했던건 아닐까요?

 

박정은 pyk73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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