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잼있게 미술읽기]ㅡ한스 홀바인 2세의 '대사들'
기사 등록 2011-10-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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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데일리 박정은 미술컬럼 전문기자]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를 방문하면 반드시 보아야 할 작품으로 한스 홀바인 2세의 '대사들'이 있습니다. 헨리 8세 시기의 주영 프랑스 대사들을 그린 일종의 초상화지만, 그림에 담겨 있는 숱한 상징과 암시들로 인해 그 시기의 유럽의 정치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역사화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작품이 완성된 것은 16세기 초이지만 14세기 경부터 유럽은 중세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성장하면서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던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르네상스를 비롯하여 지리상 발견이나 종교개혁 같은 근대화의 여명을 알리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이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대사들'은 주영 프랑스 대사들을 그린 초상화지만, 한스 홀바인 2세는 당시 유럽 사회에 불어닥친 새로운 흐름과 격변을 의미하는 상징물들을 그림 곳곳에 그려 놓았습니다. 이 작품 만큼 다채로운 역사적 배경과 온갖 상징들로 가득찬 그림도 흔치 않습니다.
정장에 모피 코트를 걸친 화려한 복장을 한 왼편의 인물은 헨리 8세 시기의 주영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이고, 오른쪽은 그의친구이자 사제인 조르주 드 셀브입니다. 장 드 댕트빌이 친구인 조르주 드 셀브의 런던 방문을 기념하여 홀바인에게 의뢰하여 완성된 작품입니다.
작품이 그려진 시기에 영국 왕 헨리 8세는 스페인 출신의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시녀 앤 불린을 두번째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헨리 8세는 이혼을 불허하는 교황청과 결별하고 성공회를 만들어 스스로 그 수장 자리에 앉으며 수장령을 발표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독실한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헨리 8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영국에 파견한 대사가 바로 장 드 댕트빌입니다.
장 드 댕트빌은 프랑스 왕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며, 조르주 드 셀브는 카롤릭내의 개혁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한 사람은 외교관이고 다른 사람은 사제지만,두 인물은 공히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분쟁을 완화하고 조정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등장 인물들의 역할과 성향만 봐도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그 시기의 종교 갈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토마스 모어 같은 당대의 인문주의자도 처형을 당하는 마당에 댕트빌 같은 일개외교관이 왕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며 전 부인들을 차례로 처형하는 잔인한 헨리8세를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간 자칫 댕트빌 자신마저 위험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작품 속의 장 드 댕트빌은 생기가 없고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2단으로 되어 있는 탁자 위에 놓인 갖가지 물품들은 이 시기의 문물(文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들입니다.탁자 상단에는 천구의를 비롯해, 휴대용 해시계 등 온갖 천문학 관련 기구들이 놓여 있고, 하단에는 지구본을 비롯해 류트 (악기), 수학책 등이 있습니다. 탁자에 놓인 물품들은 초상화가 그려진 16세기가 종교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의 시대이자 천문학과 황해술이 발달한 과학의 시대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탁자 하단에 놓인 류트라는 악기는 자세히 보면 줄이 끊어져 있고, 그 옆의 수학책은 나눗셈 부분을 펼쳐놓고 있습니다. 작품 속 물건들이 보여주는 절단과나눔은 곧 영국과 교황청의 분열, 내지는 카톨릭과 신교 사이의 갈등을 상징하는것으로 해석되고있습니다.
'대사들'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밑에 그려진 길쭉한 형상인데, 이것은 원근법의 극단적인 형태인 왜상 기법으로 묘사된일그러진 해골입니다. 아마도 당시의 심각한 정치, 종교적인 갈등과 분쟁의 끝은 곧 죽음이자 파멸이라는것을 상징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당시 인물들의 사회적 지위는 물론, 당대 인문 과학의 발전과 종교적 갈등 같은 문화적, 정치적인 사건과 팩트를 모두 아우르는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라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한스 홀바인 2세는 아우구스부르크 출신의 독일 화가입니다. 그가 작품 활동을했던 스위스 바젤이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한스 홀바인은 우신예찬으로 유명한 에라스무스와 유토피아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 같은 당대 인문주의자들의 추천으로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영입됩니다. 레스터셔 비버 성 미술관에 걸려있는 헨리 8세의 전면 초상화나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있는 헨리 8세의 상반신 초상화는 모두 그가 그린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헨리 8세에게 자신을 추천했던 토마스 모어가 처형 당하고, 나중엔 왕의 명령으로 왕의 네번째 신부감 후보의 초상화까지 그려야했으니 그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신부감 후보를 그린 작품이 악명 높은 헨리 8세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실제 모습과 다를 경우,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정은 pyk73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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