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잼있게 미술읽기]ㅡ영화 '타이드랜드'모티브가 된 명화 '크리스티나의 세계'

기사 등록 2011-11-24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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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와이어스 Andrew Newell Wyeth,크리스티나의 세계, Christina's World,1948,패널에 템페라,82 X 121cm,뉴욕 현대미술관(MOMA).

[이슈데일리 박정은 미술컬럼 전문기자]명화의 한 장면이 모티브가 되어 탄생된 한편의 환타스틱(fantastic) 동화같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테리 길리엄 감독의 '타이드랜드' (Tide Land,2005년작) 입니다. '그림 형제'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같은 기이하고 판타스틱한 작품들을 잇달아 연출하면서 팀 버튼과 함께 비주얼의 거장으로 인정 받는 테리 길리엄 감독은 한 소녀의 환상 여행을 통해 또 한편의 마법 같은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입니다.그러나 환타스틱한 유아용 동화라기보다는 다소 선정적이며 잔혹하기까지한 성인동화에 더 가까운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11살짜리 어린 소녀 질라이자 로즈로 분한 조델 퍼랜드는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귀엽고 깜찍한 외모로 밀도있는 연기력을 선보였습니다.조댈 퍼랜드는 아역을 뛰어넘어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을 이룹니다.

학교도 가지 않으면서 마약 중독자인 히피 부모의 팔뚝에 약물을 투여해주고 바비인형의 머리를 갖고 노는 어린 소녀가 있습니다. 엄마가 죽자 소녀는 아빠와 함께 할머니가 살았었다는 황량한 초원에 버려진 낡은 집으로 이주해 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빠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소녀는 고아가 됩니다. 섬뜩하리만치 기괴하고 흉물스런 폐가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인형 머리를 친구 삼아 모노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무엇보다 늦가을을 연상 시키는 갈색들판 위에 버려진 듯 덩그러니 서 있는 낡은 집과 홀로 남겨진 질라이자는 슬프지만 묘하게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만한 낡고 으시시한 집 내부는 소녀의 두려움을 배가시키고 있으며,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드넓고 황량한 들판은 홀로 남겨진 질라이자의 외로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유령이 나올법한 폐가에서 질라이자는 지독한 외로움에 썩어가는 아버지의 시신을 껴고 살아갑니다.인형 머리들과 상상의 대화를 나누면서 현실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 내려 합니다. 그러다 폐가 근처에 살고 있는 정체불명의 요상한 남매를 만나면서 질라이자가 꿈 꾸던 상상의 세계는 현실이 되고, 현실에선 마치 상상의 세계에서나 나올 법한 기괴한 일들이 속출합니다. 정신지체아 딕킨스는 소녀의 세계에선 왕자님이자 선장님으로 등장하고, 그의 누나인 델은 동생을 학대하고 소녀를 위협하는 마녀로 둔갑합니다.

질라이자의 부모나 폐가 근처에 사는 괴상망측한 남매는 모두 어른들이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어서 소녀를 보호해줄 만한 능력이없습니다. 질라이자는 그런 어른들부터 도망쳐 나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상상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런 소녀가 어른들을 흉내낼 때, 영화는 잔혹한 성인 동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머리만 남은 인형과 놀면서 어른들의 성적 세계를 훔쳐보거나 그것을 따라하려는 대목은 판타지를 넘어 한 편의 잔혹 동화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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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길리엄 감독의 '타이드랜드' (Tide Land,2005년작)

질라이자가 황량한 초원에 등장하는 장면은 앤드류 와이어스의 대표작의 하나인 '크리스티나의 세계'와 매우 유사합니다. 실제로 테리 길리엄 감독은 와이어스의 작품 에서 영감을 얻어 이 같은 장면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와 테리 길리엄의 '타이드랜드'는 구도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나 분위기상으로나 흡사한 점이 많습니다.

들판 위에 드러눕 듯 앉아 뭔가를 애타게 갈구하는 듯한 여인은 다름아닌 와이어스의 세상의 등진 젊은 친구이자 아내인 크리스티나 오슬론입니다.그녀는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팔로 겨우 몸을 지탱한 채 언덕너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그리워하는 듯한 그녀의 애처로운 뒷모습에서 외롭고 쓸쓸한 질라이자의 모습이 연상되는건 우연이 아닌 듯 싶습니다.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자유롭게 쓸 수 없었던 와이어스의 아내는 불행하게도 젊은 시절 요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와이어스의 작품에선 홀로 남은 자의 고독과 갈망, 그리고 불안이 짙게 배어있습니다.그런데 테리 길리엄은 단지 '크리스티나의 세계'만을 모티브로 한것이 아니라, 와이어스의 작품 세계 전체를 영화에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전원이나 황량한 들판, 들판 위에 세워진 집 같은 와이어스 특유의 이미지들을 고스란히 필름에 담았습니다.

영화 곳곳에서 와이어스 작품을 보는 듯한 장면들이 발견됩니다. '타이드랜드'는 단지'크리스티나의 세계' 뿐만 아니라 와이어스의 작품이 지닌 어떤 음산한 기운과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고독과 갈망의 코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컨대 들판에서 집을 바라보거나, 집안 내부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 세상을 탐색하는 와이어스의 작가적 시선이 영화에선 일라이자의 시선을 통해 그대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인 앤드류 와이어스는 몸이 허약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집안에서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하였습니다. 본인은 물론 아내마저 몸이 불편해서 그런지 그의 작품들은 대개 차분하면서도 웬지 불안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게 특징입니다. 고향을 소재로 와이어스는 전원과 들판같은 농촌의 풍경과 서정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면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와이어스는 농촌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제로 인물화나 풍경화에 주력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고독과 갈망 그리고 불안의 코드를 영화로 가져온게 바로 테리 길리엄 감독입니다. 테리 길리엄은 고독과 불안마저 끌어안는 와이어스의 섬세한 감수성에 판타지한 상상력을 가미하여 잔혹 동화로 불릴 만큼 섬뜩하면서도 매혹적인 한 편의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박정은기자 pyk73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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