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창용의 이 영화어때?]'암살' 김원봉, 남북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아나키스트

기사 등록 2015-08-03 18:10
Copyright ⓒ Issuedaily. 즐겁고 신나고 유익한 뉴스, 이슈데일리(www.issuedaily.com) 무단 전재 배포금지

[이슈데일리 여창용 기자]650만 관객을 넘어서며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암살'과 함께 무장독립운동의 대명사 약산 김원봉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은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독립군들과 임시정부대원, 그들을 쫓는 청부살인업자까지 이들의 엇갈린 선택과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그린 이야기다.

김원봉은 극중 김구(김홍파 분)와 함께 친일파 암살작전을 계획하는 의열단장으로 등장하며 조승우가 연기했다. 김구는 대한민국 사람은 누구나 아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대부지만 김원봉은 독립운동사 전문가가 아니면 생소한 이름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무장투쟁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의열단을 도직해 조선총독부와 일제를 상대로 무장독립투쟁을 펼쳤으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부사령관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의열단을 조직해 경찰서, 총독부 청사 등에 폭탄을 던지고, 친일파를 암살하는 등 적극적인 무장투쟁활동을 펼쳤다. 친일파 및 일제 요인을 암살하고, 관공서에 폭탄을 던졌던 김지섭,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등이 김원봉이 조직했던 의열단의 단원이었다.

하지만 의열단이 1930년을 전후로 민족주의 노선에서 급진좌파의 노선으로 변질되면서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장교 신분으로 북벌 및 일제와 전투에 참여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주의민주전선, 인민공화당 등에서 활동했다.

이후 북에 건너가 북한 정권에서 관료 및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1958년 11월 연안파 숙청작업 때 숙청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처형인지 자살인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약산 김원봉에 대해 운암 김성숙은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라며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의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모든 정열을 쏟아서 뜻을 이룬다"고 평했다.

때문에 김원봉을 따랐던 동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사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가장 큰 능력이었다는 평이다.

항일무장독립투쟁의 대명사인 김원봉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민족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변모한데다 북한에서 주요직을 지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업적이 평가절하됐다. 게다가 북에서도 숙청을 당했기에 북한에서도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원봉이 1948년 남북협상 이후 북한에 잔류해 관료 및 정치인으로 있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수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월북한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그렇다.

하지만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김원봉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해방 후 친일파들에게 위협을 받아 북으로 넘어갔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 여부가 독립운동가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만한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사회주의자면 독립운동자체도 낮게 평가받는 것이 논리적인지에 대한 문제도 제기할 수 있다.

 

여창용 기자 hblood78@

 

기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