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창용의 사극돋보기]'징비록' 조-명-일 군주 분석 1. '콤플렉스 대왕' 선조

기사 등록 2015-03-2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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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데일리 여창용 기자] KBS 1TV 정통대하사극 '징비록'이 본격적인 임진왜란 이야기를 다루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다.

'징비록(극본 정형수, 정지연, 연출 김상휘, 김영조)'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했던 혁신 리더 류성룡이 임진왜란 7년을 온몸으로 겪은 뒤, 국가 위기관리 노하우와 실리 위주의 국정 철학을 집대성해 미리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 환란을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집필한 동명의 저서를 바탕으로 하는 대하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임진왜란' 사극과는 차별화되게 난세를 극복한 명재상 류성룡(김상중 분)과 선조(김태우 분)를 중심으로 당시 조선의 붕당정치와 일본, 명나라 등 동북아 국제정세의 흐름을 그리고 있다.

'징비록'에서 선조는 조선 최초 방계 출신 왕으로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격지심이 강한 인물로 그려진다. 류성룡의 충심을 알고도 그를 경계할 수 밖에 없는 그의 콤플렉스는 역사상 최악의 전란을 극복하는데 발목을 잡게 된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며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에게서 낳은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다. 반전으로 쫓겨난 연산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중종은 반정 공신들의 입김에 휘둘렸고, 그 뒤를 이은 인종과 명종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단명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른 것은 명종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명조 재위기에 하성군에 봉해진 선조는 명종이 승하하자 임금으로 즉위했다. 즉위 초년에는 매일 강연에 나가 경사를 토론하는 등 학문에 매진했다.

또한 당시 기득권 계층이었던 훈구세력을 몰아내고 사림을 대거 등용하면서 정치판 물갈이를 시도했다. 선조의 이같은 조치는 방계 혈통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사람들로 조정을 꾸려가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선조가 중신들에게 진정한 군주로 인정받게 되는건 바로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사실을 수정했다는 점이다. 명나라 '대명회전' 등 중국 역사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예라는 그릇된 사실 200년간이나 전해 내려온 것을 윤근수 등을 사신으로 보내 시정하도록 했다.

이 업적은 선조가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도록 하는데 큰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와 함께 신하를 의심하는 그의 습관은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여립의 옥사'로 동인 세력을 탄압했던 선조는 반대로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 세력에게서 권력을 회수했다.

비록 콤플렉스가 심하긴 했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근면했던 선조는 역사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북아를 뒤흔든 '임진왜란'은 그에게 '무능한 군주' '무책임한 군주'라는 가혹한 평가를 받게 한다.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고, 류성룡 등 대신들이 위협을 경고하고,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야욕을 흘렸음에도 선조는 전란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결국 1592년 일본이 대규모 침공을 해왔고, 조선군은 연전연패했다.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가게 됐다.

한양이 함락되고, 이어 개성, 평양까지 밀려간 선조는 의주에 머물렀다. 선조가 할 수 있는 것은 명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는 것과 함께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분조해 숨어 있는 것이었다.

각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기습하고, 이순신이 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격파하며 승리를 거두자 빼앗겼던 평양성을 되찾고, 전쟁 발발 1년만에 일본군이 철수하자 선조는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다.

전쟁은 장기화됐다. 장기화된 이유는 일본과 명이 조선을 배제하고 서로 협상을 벌였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는 조선은 물론 명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조선, 명, 일본은 싸움을 이어나가게 됐다.

하지만 선조는 파병온 명나라 군대에게 극진한 정성을 보였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걸고 싸운 이순신과 의병들에게는 냉담했다. 의병들의 공을 폄하하는 것은 물론 공을 세운 이순신과 의병장들을 죽이려고 했다. 결국 호남의 의병장 김덕령은 역모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을 가서도 명나라에 망명을 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신하들의 거센 반대와 함께 명 조정의 강력한 거부로 망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선조는 끊임없이 선위를 거론하며 신하들의 애를 먹였다.

선조가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는 동안 세자로 임명된 광해군은 전장을 누비며 장수와 의병들을 격려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등 지도력을 발휘했다. 선조의 콤플렉스는 아들 광해군에게 향했다.

전쟁이 끝난 뒤 선조는 계비 인목대비를 통해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는 광해군이 차기 보위를 이어받는데 큰 위협이 됐다. 게다가 조정 대신들(특히 서인 세력)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 못한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선조 사후 광해군은 명청 교체기에서 조선을 전쟁의 위협에서 막아냈지만 명 사대주의로 똘똘 뭉친 대신들에게 탄핵을 받아 쫓겨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국토는 다시 전쟁터가 된다.

선조는 지도력이나 군주의 자질 면에서는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능력이 아주 부족한 왕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이 없었다면 무난하게 국가를 운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던 나약한 멘탈의 이 군주는 나라를 전쟁터로 만든 것도 모자라 사후에도 전란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창용 기자 hblood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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