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창용의 이 영화어때?]'암살' 김원봉-김구, 안타까운 독립투쟁사의 두 거물

기사 등록 2015-08-0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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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데일리 여창용기자]700만 관객을 넘어 천만관객 영화에 도전하고 있는 '암살'이 항일무장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은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독립군들과 임시정부대원, 그들을 쫓는 청부살인업자까지 이들의 엇갈린 선택과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그린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독립군들에게 친일파 강인국 암살을 지시하는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과 상해 임시정부의 대표격인 백범 김구(김홍파 분)가 함께 등장한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친일파 척결을 다짐하는 모습을 보인다. 독립운동의 두 거물이 보여준 모습은 사실일까?

한국독립운동의 비극은 다양한 노선이 의기투합하지 못하고 사분오열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노선이 서로 갈등했고, 투쟁 방식의 차이도 갈등의 요인이었다.

미국 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며,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의 무장독립투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자였던 백범 김구는 김원봉의 투쟁 방식을 인정했지만 사회주의 노선은 경계했다.

특히 1922년 상해황포탄의거는 무장독립투쟁이 미국 정부의 반감을 사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의열단은 1922년 3월 28일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가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이 의거를 맡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1선의 오성륜이 쏜 탄환이 영국인 여성에게 맞았고, 2선의 김익상이 다나카를 저격했지만 모자를 관통했다. 3선의 이종암은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되면서 거사는 실패했다.

결국 김익상과 오성륜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오성륜은 탈옥에 성공했지만 김익상은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돼 사형언도와 무기징역을 거쳐 20년 징역형으로 복역했다. 출옥 후 김익상은 일본 형사에게 살해당했다.

무장독립투쟁에 서양인이 휘말려 목숨을 잃은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우리의 무장독립투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됐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승만이 무장독립투쟁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온건한 투쟁을 지향하던 백범 김구도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 윤봉길 의거로 김원봉과 의열단의 무장독립투쟁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광복군을 조직해 일제와 전면전을 준비했다.

백범 김구, 약산 김원봉 모두 조국의 독립을 바랐던 사람들이다. 단 김원봉은 보다 적극적인 투쟁을 추구했고, 김구는 합리적인 투쟁을 원했던 사람들이다. 두 독립투쟁의 거물이 힘을 합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

결국 김원봉은 해방 후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의 탄압을 피해 월북했다가 김일성에게 숙청당했고, 김구는 염동진이 조직한 극우단체 백의사 소속 군인 안두희의 총에 쓰러졌다.

아직까지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비극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여창용기자 hblood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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