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의 영화가 사랑한 사진] '트루먼 쇼'와 포토 리얼리즘-사생활을 은밀히 엿보는 눈

기사 등록 2011-06-2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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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데일리 김석원 위원] ‘엿보기 욕망’을 만족시키는 영화

호주 출신 ‘피터 위어(Peter Weir)’ 감독의 <트루먼 쇼The Trueman Show>는 <가타카(Gattaca)>를 쓰고 연출한 앤드루 니콜이 시나리오를, <나인 하프 위크>,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찍은 ‘피터 비쥬(Peter Biziou)’가 촬영을 맡은 영화이다. 트루먼의 행동과 성장 과정은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시청자에게 자연스럽게 1년 365일 동안 관찰당한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심리이다. 그것을 단지 영화 속에서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 대중적 욕망을 부추겼다.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엿보는 욕망 즉 ‘관음증(Voyeurism)’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수은 없다. 나 혼자만이 은밀히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대에 동시다발적으로 볼 수 있는 드라마의 특성으로 인해 시청자로 하여금 윤리적인 문제에 휘말리지 않게 한다는 빌미를 제공한다는데 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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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Michael Foucault)가『감시와 처벌』에서 지적했듯이 18세기에 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판 옵틱콘(panoptique)’의 경우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벤담이 고안한 이 장치는 원형으로 설계한 감옥인데, 중앙에 감시탑이 있고 원둘레에는 여러 개의 작은 감방들이 있다. 중앙의 감시탑은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원둘레의 감방들은 빛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중앙 탑의 감시자는 자기의 모습은 내비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반면, 감방에 갇힌 사람들은 보지 못하면서 보이는 입장이 된다. 이곳의 죄수와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에게 감시당하는 영화 속의 트루먼의 처지와 비교해보면 동일한 맥락으로 일치된다. 중앙에 있는 감시탑은 영화에서는 ‘달’의 역할 즉 쇼 연출과 제작을 지휘하는 주조정실과 일치된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조종실에서 그의 행동과 사생활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네가 살고 있는 이곳은 진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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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짜로 존재하는 세계일까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당연한 말은 오히려 묻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게 할 것이다. 누가 나에게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내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느끼는 것이 진실이고 진짜라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이처럼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 의문점을 제시한 사람은 철학자 플라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철학적인 요소는 피하기로 하고,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실재(Real)’로 존재하는 것이 진짜인지 그렇지 않은지 혼동하는 문제에 대해서 ‘포토리얼리즘(Photo realism)’과 연관하여 여러 가지 예를 살펴보자. 첫째는 트루먼이 살아가는 환경과 모든 사람, 사물들이 텔레비전 제작사에서 만든 세트장이라는 점이다. 트루먼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진짜라고 믿게 된 이유는 그의 주변에 있는 대상, 즉 마을과 백사장과 바다 등과 사람들이 그와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친구나 가족의 경우는 더욱 친밀한 존재인데, 이러한 대상은 ‘일종의 환상’인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트루먼과 관계없이 따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트루먼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 외에도, 그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확신은 트루먼 역시 실제적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자신의 부인과 급작스럽게 시카고로 떠나자고 제안하고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표지판에 ‘산불예방 조심’ 이라는 문구가 나타나는 부분이다. 트루먼의 부인은 굉장히 당황하지만, 트루먼은 거침없이 지나친다. 그의 예상대로 눈앞에 ‘실제’하는 불이라면 차가 지나간 후에도 계속 불길이 이어져야 당연하지만, 트루먼이 만난 산불은 그렇지 않다. 이 산불은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하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만든 일회용 산불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자기가 실제로 살고 있는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명백한 사실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1년 365일 텔레비전 화면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생활하던 주인공은 어는 날 화면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담당 연출자는 이 잡듯이 그를 찾았고, 바다를 향해서 항해하는 주인공을 발견한다. 그가 계속 항해하도록 놔두었다가는 그가 사는 세트장이 발각될 위험이 있으므로 피디는 인공적인 파도를 이용해서 그의 항해를 멈추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항해를 계속한다. 주인공은 “차라리 나를 죽여라.”라고 소리친다. 파도가 지나치게 높아지자 그의 안전을 위해서 파도의 강도를 약화시켰고 주인공은 항해를 계속하던 중 바다를 만든 세트의 마지막 지점에 다다랐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의 앞부분이 부딪쳤고, 세트로 만든 파란색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트루먼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 그 장소를 빠져나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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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와 포토리얼리즘을 연결해서 이야기한 것은, 포토리얼리즘이 단순하게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고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테마가 같기 때문이다. 앞의 예시에서와 같이 현실이라는 대상을 재현한 이미지는 일종의 ‘환영’으로서 아무리 똑같이 재현한다 하더라도 환영이 실제 대상이 될 수 없다. 단지 실재하는 사실과 같아 보일 뿐이다.

김석원(문화 평론가/ 미디어 아트 박사, ksw50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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